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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고통의 시대 – 우리는 모두 아프다 / 아프지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 침묵의 고통에 대하여

말하지 못하는 고통의 시대 – 모두가 아프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 요즘 사람들은 몸이 아픈 것보다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더 무겁게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지쳐 있다. 모두가 불안하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 침묵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예전엔 아프면 말했다. “나 요즘 힘들어.” “왜 이렇게 사는 게 버거운지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 말해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 위로도 기대할 수 없으니까   • 오히려 “너만 힘드냐”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렵다 그래서 우리는 침묵하고, 그 침묵이 또다른 사람의 침묵이 되고, **고통은 공통어가 아니라, 공통된 ‘무언’**이 된다. ⸻ 공감 대신 서로를 견뎌내는 관계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에게 기대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단, 버티고 견디는 법을 배운다.   • 말하면 부담이 되니까   • 듣는 것도 피곤하니까   • 그냥 혼자 버티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우리는 점점 멀어진다. 관계는 존재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없다’는 느낌은 더 강해진다. ⸻ 모두가 아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시대의 가장 묵직한 고통은 이것이다.   • 말할 수 없는 고통   • 말해도 들리지 않는 고통   • 모두가 겪고 있지만, 아무도 꺼내지 않는 고통 결국, 고통은 ‘개인의 문제’로 포장된 집단적 침묵이 된다. ⸻ “고통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한다고 다 해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말할 수 없을 때,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 언어로 말하지 못한 고통은   • 몸으로, 감정으로, 관계 속에서 삐져나온다 침묵은 그 자체로 상처...

말하지 못하는 고통의 시대 – 모두가 아프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 돌뿌리가 사라진 시대 – 깨달음의 기회조차 잃어가는 우리 한때는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멈추게 되었다. 그 멈춤은 고통이었지만, 때로는 생각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몸이 아프면 삶의 속도를 늦추었고, 마음이 흔들리면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되묻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넘어질 돌뿌리마저 사라진 시대다. ⸻ 삶은 더 부드러워졌지만, 더 아프다 우리는 편리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음식을 주문하려면 손가락만 까딱하면 되고, 모르는 건 검색하면 1초 만에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시스템 속에서 인간은 더 자주 피로를 호소하고, 더 쉽게 방향을 잃고, 더 자주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고통은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것에서 오는 고통이다. 기술은 앞서가고, 인간의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 예전에는 ‘살기 위한 고통’이 있었다 전쟁, 기아, 생존. 예전의 고통은 명확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투쟁이었고, 그 속에서도 “나는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존재의 의지가 있었다. 삶은 힘들었지만, 삶의 이유는 분명했다. 그래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내가 왜 여기 있지?”라는 자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 지금의 고통은 모호하다. 그래서 더 무섭다 지금은 그런 고통조차 형체가 없다. 의식 없이 살아도 생존은 보장된다. 그러나 살고 있는데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지금 이 삶이 진짜 나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예전에는 뼈가 부러졌다면, 지금은 정체성이 흐려지고, 자아가 무너진다. ⸻ 수행할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불행이 수행의 계기가 되었다. 불을 잃은 집터 위에서, 사랑이 떠난 빈방 안에서, 슬픔은 영혼을 열었고, 고통은 질문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질문조차 할 시간이 없다. 플랫폼과 콘텐츠와 시스템이 생각하고 슬퍼하고 멈추는 시간을 모두 가져가 버렸다. 세상이 우리에게 쉬라고 말하지 않으니, 우리는 스스로 쉬는 법을 잊어간다. ⸻ 고통을 ...

나는 조용한 사람입니다 – 내향인의 자존감 이야기 / 침묵은 나의 힘 – 소음 시대에 내면을 지키는 삶

조용한 사람의 자존감 — 내향적인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유 나는 조용한 사람이다. 사람 많은 자리에선 뒤로 물러나 있고, 시끄러운 공간에선 말이 줄어든다. 누군가 나에게 “왜 이렇게 말이 없어?“라고 물으면 그저 웃으며 넘기지만, 마음속에는 늘 이런 생각이 맴돈다. “나는 왜 이럴까?” 어릴 적부터 그랬다. 활발하고 외향적인 친구들이 주목받을 때, 나는 조용한 구석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쪽이었다. 말은 적었지만, 생각은 많았고, 표현은 서툴렀지만, 마음은 풍부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조용하다는 것이 마치 결핍처럼 느껴졌다. 좀 더 나서야 하고, 좀 더 떠들어야 하고,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서 멀어질수록 나는 내가 더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렀고, 나는 조용한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그 속에서 나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 나는 단지, 조용한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존감은 큰 소리를 내지 않아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라났다. 나는 잘 듣는다. 사람들의 말 사이에서, 말하지 않은 마음을 읽는다. 나는 깊이 본다. 사물과 풍경, 그리고 사람의 눈빛에서 본질을 바라본다. 나는 오래 기억한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나를 울린 장면, 문득 스친 감정을. 이건 조용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의 언어다. 소란보다 섬세함을, 속도보다 깊이를 택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삶의 결이다. ⸻ 조용한 나를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안다. 사람은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다름은 부족함이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것을. 외향적인 사람은 빛처럼 세상을 비추고, 내향적인 사람은 뿌리처럼 세상을 지탱한다. 나는 밖보다 안을 보고, 말보다 침묵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나는 조용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조용하지만, 결코 무력하지 않다. 내 안에 단단한 자존감이 있다. 그건 남이 확인해준 게 아니라, 내가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스스로에게 쌓아온 믿음이다. ⸻ 이제 나...

내향적인 사람에게 바치는 변명이자 찬사 -조용하지만 단단한, 나의 빛나는 본성에 대하여

내향적인 사람에게 바치는 변명이자 찬사 -조용하지만 단단한, 나의 빛나는 본성에 대하여 나는 내향적인 사람이다. 고요할 때 힘이 생기고, 조용한 공간에서 생기가 돌고, 혼자 있을 때 비로소 나다워진다. 활기찬 군중보다는,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적막한 순간이 소중하다. 어릴 적 나의 취미는 아주 분명했다. 만화책. 그 안에 모든 세계가 있었다. 북두신권, 드래곤볼, 시티헌터… 매일같이 만화방을 드나들던 그 시절은, 감수성이 최고조였던 나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활자와 친해진 것도, 이야기를 사랑하게 된 것도 다 그 덕이었다. 문자의 세상에 빠지면서 무협지를 만났고, 그 광활한 세계는 또 다른 우주였다. ⸻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내향적인 사람은 세상과 조금 거리를 둘 수도 있지만, 자기 내면, 영혼, 의식과 더 가까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밖을 향한 관심보다 안으로 향한 주의가 많기에, 내 몸의 감각, 내 영혼의 움직임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내향적인 사람은 수행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믿는다. 고요 속에서 자라고, 적은 사람들과 깊게 맺고, 소란보다 침묵을 선택하며, 결국 스스로와 더 친밀해지는 사람. ⸻ 어릴 적 소중하던 친구들이 지금은 1년에 몇 번 만나는 정도가 되었지만, 그들이 나에게 특별했던 시간은 여전히 빛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동료가 아니라, 삶의 고비마다 만나게 된 이들이고, 그 속에서 더 단단해진 나를 본다. ⸻ 한때는 생각했다. 내향적인 성격, 혹시 부족한 성격은 아닐까? 좀 더 활달했다면, 좀 더 외향적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내향성은 내 복이었다. 조용히 바라보고, 깊이 고민하고, 느낌과 감정을 섬세하게 살펴온 시간들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 요즘 나는 자주 확인받는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내 안의 감각과 생각이 헛되지 않았음을. 남이 아닌, 나 자신에게서 먼저 확인받고 있다. 그리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

🌿 “수행은 재미없지만, 그래서 더 진짜다”

🌿 “수행은 재미없지만, 그래서 더 진짜다” 나는 수행이 재미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공부의 노래처럼, 수행도 당근 같다. 씹을수록 딱딱하고 맛은 없지만, 몸에 좋은 걸 아니까 먹는 거다. 먹어야 하니까. 먹어본 사람만 알지. 나도 그 영양을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봤기 때문에 계속 할 수 있는 거다. ☀️ 아침에 머리 감기 싫다. 세수하기도 귀찮다. 가족이 뭐라 해도, 나갈 일 없으면 그냥 이불 속에 한참 누워 있는 날도 있다. 이불 정리도 귀찮고, 시금치 몇 가닥 더 먹는 것도 노력이다. 하지만 알잖아. 그 작은 노력이 몸을 바꾸고, 마음을 맑게 한다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은 억지로, 조금은 가만히… 다시 수행을 한다. ⸻ 💭 사람들이 날 오해할까 걱정된다. 나는 규칙적인 사람도 아니었고, 수행에 빠져 살아온 사람도 아니다. 나도 똑같이 사람이다. 다만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내 마음, 내 의식, 내 영혼. 그걸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 나는 내 몸이 ‘나’가 아니라는 걸 안다. 이 몸은 언젠가 벗고 떠날 옷과도 같다는 것.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걸 믿으며 살아온 사람일 뿐이다. ⸻

“수행의 진짜 얼굴 – 밥처럼 물처럼, 반복 속에 깃든 진리”

“수행은 재미없다 – 물처럼, 밥처럼” ⸻ 우리는 물을 마신다. 물은 맛이 없다. 커피, 콜라, 환타, 술— 자극은 있지만, 그것만 마시고는 살 수 없다. 몸을 살리는 건 결국, 물이다. 지속가능한 건 물이다. ⸻ 밥도 마찬가지다. 밥은 달지 않다. 밥은 짜지 않다. 밥은 화려하지 않다. 그래서 반찬이 필요하다. 국이 필요하다. 고기가 있어야 밥맛이 산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에게 이렇게 묻는다. “밥 먹었어?” “김치찌개 먹었어?” “돼지갈비 먹었어?” 라고는 묻지 않는다. 밥이 기준이다. 물이 중심이다. ⸻ 수행은 그 밥과 같다. 재미가 없다. 화려하지 않다. 감각을 자극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초를 만든다.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 삶을 깊게 한다. ⸻ 공부도 그렇다. 처음엔 재미없다. 중국어 단어, 영어 문장 외우는 것처럼. 하지만 하다 보면 느껴진다. 하루, 이틀, 한 달 지나면 내 안에서 조용한 반응이 온다. ⸻ 재미는 순간을 채운다. 수행은 생명을 채운다. 맛있는 건 빨리 질린다. 강한 자극은 곧 고통이 된다. 하지만 수행은 먹어도 먹어도 시원해지는 물처럼, 퍼도 퍼도 줄지 않는 밥처럼 우리 삶의 근본이 된다. ⸻ 수행은 재미없다. 하지만 살게 한다. 수행은 재미없다. 하지만 진짜다. ⸻

삶은 여행이다 – 영혼이 남긴 발자국

삶은 여행이다 – 영혼이 남긴 발자국 ⸻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 삶이라는 건 어쩌면 여행과 같지 않을까?”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는 기대에 차 있다. 무엇을 만날지, 어떤 풍경을 볼지 상상하며 설렌다. 막상 떠난 여행지에서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낯선 풍경 속에 스며들고, 때론 길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돌아온 후, 그 순간들을 다시 떠올릴 때 어떤 장면은 아련하게, 어떤 감정은 따뜻하게 가슴을 데운다. 그 모든 경험이 모여 “좋은 여행이었다”고 말하게 한다. 삶도 그렇다. 우리는 영혼의 무언가가 이 여행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 몸으로 떠나는 여행, 영혼이 계획한 길 나는 여행을 참 좋아했다. 어릴 적, 그리고 젊은 시절엔 외국을 많이 다니며 다양한 문화를 보고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었다. 눈으로, 손으로, 입으로, 그리고 냄새로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오감의 체험이었다. 그 체험들은 내 안에 깊이 쌓였고, 어느덧 그것이 나의 사고, 의식,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삶도 마찬가지다. 영혼이 계획하고, 몸을 통해 체험하며, 그 기억은 의식에 누적되어 간다. ⸻ 모든 고통과 기쁨은 이유가 있다 삶이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숙제 같기도 하고, 어떤 죄의 갚음을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통은 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관문이다. 경험은 축적되고, 그 축적은 결국 지혜가 된다. 📿 불교는 말한다: “고를 통찰하면, 그 원인과 소멸을 보게 된다.” (사성제) 삶은 수행의 장이며, 경험하지 않은 고통은 해탈을 방해하는 그림자로 남는다. ✝ 기독교는 말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로마서 5:3–4)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영혼을 연단하는 도구다. 🕉 힌두교는 말한다: “아트만(영혼)은 죽지 않으며, 육체를 바꾸듯 옷을 갈아입는다.” (바가바드 기타) 삶은 카르마를 정리하고, 의식을 성장시키는 성스러운 여정이다. ☪ 이슬람은 말한다:...

부모의 사랑 / 성장의 회상 / 세대 간 연결 - “어머니의 품에서 배운 사랑 – 세대를 잇는 따뜻한 기억”

『어머니의 품, 그리고 세대를 잇는 사랑』 나는 차분히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빚을 지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 어린 시절 단 한 순간의 보살핌도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무탈하게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시골의 조용한 환경 속에서 스트레스는 적었고,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함을 느낀 기억도 없습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그립고 사랑스러운 향수처럼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바로 그 조용했던 시골에서의 어린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그리고 대학부터는 다리에 족쇄가 풀린 듯, 내 마음대로 세상을 다니며 고통받고, 깨지고, 깨어나는 의식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 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도 사랑과 감사를 느끼지만, 나를 키워준 건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였습니다. 그분들로부터 나는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가득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사랑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 갚을 수 없는 큰 빚입니다. 나는 결코 여성이 맡은 역할이나 책임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세대는 그렇게 여성들을 통해 연결되고, 계승된다고 믿습니다. ⸻ 남자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싸워나갑니다. 그 사이, 여성은 가정을 지키며 남자를 따뜻하게 품어주고, 자식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아붓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자라고, 나이가 들면 아버지로부터 책임감과 의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서 다시 여성을 지키고, 사회를 지키는 어른이 되는 것. 남자와 여자는 하나이며, 그 세대를 잇는 가장 중요한 고리는 바로 여성입니다. ⸻ 내가 이 세상에 안전하게 태어나고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 따뜻하게 보호해 준 그 어머니의 사랑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 나는 여성이 짊어지는 역할이 단지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고, 고요한 요새이며, 존재 전체를 품는 눈과 마음입니다.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책임이자 동시에 무한한 행복의 샘입니다. 내 입보다 아이의 입...

📘 욕하지 말고 늦춰라 – 악의 속도를 늦추는 존재가 되는 법

📘 욕하지 말고 늦춰라 – 악의 속도를 늦추는 존재가 되는 법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세상은 마치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 아래 잘 다듬어져 모두가 자연스럽게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 같다. 그 자의 계획은 정교하고, 사람들은 욕심으로 그 길을 열심히 따라간다. 놀라운 건 그게 전혀 강제 같지 않다는 점이다. 모두가 “원해서” 그렇게 가고 있다는 것. ⸻ 🔧 너무 잘 짜인 세상   • 악은 질서 정연하게 퍼진다.   • 무너짐은 효율적이고,   • 타락은 논리적이며,   • 파괴는 사회적 합의처럼 보인다. 누군가 그것을 기획하고 있다고 느낀다. 너무 완벽하게, 너무 무결하게. 그리고 그것은 성공하고 있다. ⸻ 🧍‍♂️ 그런데… 문제는 나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세상을 만드는 데, 나도 일조했다.   • 내가 침묵했고,   • 내가 늦게 반응했고,   • 내가 그냥 “다 그런 거지”라고 넘겼고,   • 내가 편리함을 선택했고,   • 내가 진실보다 체면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세상이 조금 더 빨리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 🌊 지금 세상은 “결과”다 지금 이 타락한 세상은 내가 만든 건 아닐지 몰라도, 내가 저지하지 않은 결과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그 세상을 욕하는 건 물에 빠진 사람에게 “왜 빠졌냐”고 묻는 것과 같다.   • 욕은 해결이 아니다.   • 분노는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욕은 그 자에겐 칭찬이고, 인간들에겐 더 깊은 무력감이 될 뿐이다. ⸻ 🐢 늦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크게 바꿀 수도 없고, 모두를 깨울 수도 없다. 하지만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 내가 조급해하지...

고통은 어떻게 의식을 바꾸는가 – 수행자의 시선에서

📘 수행과 고통 – 고통은 의식을 어떻게 바꾸는가? 나는 진심으로 생각한다. 고통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고통이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 고통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에 따라 그 고통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주사를 맞는 것을 떠올려보자. 같은 바늘이 피부를 찌르지만, 그것을 ‘회복을 위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단지 고통 그 자체로 느끼는 사람은 통증의 정도도, 그 이후의 몸의 반응도 완전히 다르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고통은 단순히 견딜 대상이 아니다. 의식을 깨우고, 방향을 틀게 하고, 통찰을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 ⸻ 하지만 현실의 수행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단지 육체를 몰아붙이는 고통, 무리하게 반복되는 수련, 심지어 **정신이 따라오지 못한 상태에서의 무분별한 ‘수행’**은 오히려 의식의 퇴행을 불러온다. 사람은 고통 앞에서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은 의식의 단계에 맞게 주어져야 한다. 너무 약하면 깨우침이 없고, 너무 강하면 부서지고 만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통의 강도를 조절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스승’**이라고. 좋은 사부가 있다면, 그 사람의 의식 수준에 맞춰 그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 그리고 진짜 성장할 수 있는 방향을 함께 잡아줄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수행자에게는 그런 스승이 없다. 그리고 스스로도 자신의 한계를 모른 채 고통 그 자체를 미화하고, 지나온 시간만을 자랑거리로 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는 출가한 지 10년이야.” “나는 삼천배를 몇 번 했어.” “나는 엄청난 고통을 견뎌봤지.” 이런 말은 때때로 수행의 깊이를 드러내기보다, 형식의 오래됨을 자랑하는 함정에 빠져 있다. ⸻ 오래 했다고 잘하는 건 아니다. 영어를 10년 공부했다고 3년 집중한 사람보다 반드시 잘하는 건 아니듯이. 얼마나 진심이었는가. 얼마나 깨어 있었는가. 얼마나 깊이 바라보며 견뎌냈는가. 그 모든 것이 수행과 고통의 진실한 결과를 결정짓는다. ⸻ 그래서 나는 말...

내향성의 가치 / 자기 선언 / 조용한 존재의 힘 - “조용한 나도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 – 내 안의 선언”

나의 선언 – 조용한 빛으로 나는 한동안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말도 행동도 너무 조심스러웠고, 마음은 자주 외로웠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조용한 사람에게도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 크게 외치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에 조용히 닿는 말이 있고,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살리는 순간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주 작고, 아주 느릴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진심이다. ⸻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나만의 방식으로 빛이 되려 한다. 누군가의 어깨를 살며시 토닥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이 세상이 너무 빠르더라도 나는 나의 속도로, 나만의 리듬으로 사랑을 전하고 싶다. ⸻ 조용한 빛은 멀리 간다. 그걸 나는 이제 믿는다. ⸻ – 유비 더원, 조용한 봄날에

숨겨진 여성의 역사 / 이름 없는 영웅 / 세대를 지탱한 존재들 - “이름 없이 세상을 지켜낸 그녀들 – 잊히지 않은 존재들”

《깨어나는 여성 영웅들》 제1장. 그녀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 그녀들은 이름 없이 떠났습니다. 전장에도 나서지 않았고, 역사의 책에도 자주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세대는 끊겼고, 영웅은 탄생하지 못했으며, 그 어떤 천하도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 ■ 그들은 곁이 아니었다, 중심이었다 역사는 말합니다. 영웅 곁에는 반드시 한 여인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녀들은 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 전쟁이 벌어지기 전, 조용히 전략을 지핀 자였고,   • 한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기 전, 눈빛으로 붙잡은 존재였고,   • 무너진 세대와 세대를 다시 꿰맨 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숨은 기둥이었습니다. 집을 짓는 이는 드러났지만, 기둥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집은 기둥으로 버텼습니다. ⸻ ■ 그녀들의 말은 기록되지 않았다 황용의 말, 조민의 눈빛, 여설의 고요함… 이들은 역사의 거대한 전쟁사 속에서 종종 ‘부록’처럼 취급됐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반대입니다. 그녀들의 한마디, 한 걸음, 한 선택이 수많은 영웅을 살렸고, 왕조를 이어졌고, 정신을 보존시켰습니다. ⸻ ■ 우리는 지금, 그녀들을 다시 부른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성은 여전히 곁으로 밀려납니다. “강한 여성”은 이상한 시선으로 보이고, “지혜로운 여성”은 때때로 거부당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녀들을 다시 불러야 합니다. 그리고 말해야 합니다. “그녀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침묵했을 뿐이다.” ⸻ ■ 당신 안에도 그녀들이 잠들어 있다 당신이 결단할 때, 당신이 고요히 무너지지 않을 때, 당신이 고통을 지혜로 바꿔 낼 때, 그녀들이 다시 눈을 뜹니다.   • 황용이 깨어나고,   • 조민이 고개를 들고,   • 여설이 조용히 숨을 내쉽니다. 그녀들의 숨결이 당신의 의식에서 다시 살아날 때, 우리는...

스승의 자비 / 수행자의 길 / 고통 속 자각 - “칼날 같은 가르침, 자비로 깨어나게 하다 – 참스승의 얼굴”

**제목: 괴팍한 스승의 자비 – 칼끝 같은 사랑** --- 진짜 스승은 미움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제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건 오직 체험으로만 피와 땀으로만 깨달아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스승은 때로 괴팍하다. 차갑고 날카롭다. 그 사랑은 칼끝 같아서 제자의 허영과 나약함을 무참히 잘라낸다. --- 스승은 알고 있다. 제자가 올라가야 할 절벽, 견뎌야 할 전쟁, 넘어야 할 에베레스트를. 그곳에는 달콤한 말도 부드러운 격려도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스승은 등을 돌리고, 뒤에서 바라보며 가끔은 채찍을 든다. 살아남게 하기 위해. 남자로, 사람으로 설 수 있게 하기 위해. --- 외로운 자리. 스승의 길. 그 자리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곳. 그러나 제자가 언젠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스스로 길을 밝히는 날이 오면, 그제야 알게 되리라. 괴팍했던 그 스승이 가장 깊은 사랑의 얼굴이었다는 것을.

고통의 끝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낸 사람의 언어

고통의 끝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낸 사람의 언어 1. “예전엔 버티고, 길을 두드렸다.” 그때의 나는 밖으로는 괜찮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벽 앞에 혼자 서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어디로 가야 할지 보이지 않았고, 희망은 점점 흐려졌지만, 나는 여전히 문을 두드렸다. 어떤 문이든, 어디든. 그 사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든 시작이었고, 과거가 아니라 근원이었다. 2. “지금은 힘들지는 않아. 일이 늘었을 뿐이다.” 지금 나는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저 할 일이 많을 뿐이다. “괴로운 게 아니라, 사명이 있다.” “지친 게 아니라, 책임이 있다.” 이 말들은 나 자신을 속이기 위한 말이 아니다. 내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3. “스트레스가 아닌 고민.” 예전엔 똑같은 상황에서도 “스트레스”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건 고민이다. 스트레스는 피하고 싶은 압박이고, 고민은 무언가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다. 나는 지금 도망치지 않고, 억지로 버티지도 않고, 그저 나의 삶을 빚고 있는 중이다. 4. “감사할 뿐이지.” 예전에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말들이 입에 붙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물음들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단 하나의 말이 남았다. “감사하다.” 그 한 마디가 내 하루를 설명하고, 내 고통을 덮고, 내 존재를 붙들어준다.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고통에 휘둘리지 않는다. 나는 그 시간을 지나왔고, 그 길 위에 여전히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모든 순간이 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할 뿐이다.

겸손의 본질 / 인생의 지혜 / 내면 성장의 언어 -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높이는 것이다 – 내가 배운 한 가지”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일이다 – 내가 인생을 살아오며 가장 깊이 알게 된 지혜 한 가지 ⸻ 살아오며 나는 여러 가치, 여러 말들을 들었다. 성공, 노력, 리더십, 도전… 다 중요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속에 하나의 단어가 자꾸 떠오른다. 겸손. ⸻ 나는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지혜로운 말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겸손하라.” ⸻ 겸손은 나를 작게 만드는 말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내 안의 나를 더 크게 이해하고,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다. ⸻ 겸손은 자기 비하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겸손을 “나는 부족해요”, “나는 아니에요” 하는 식의 자기 포기나 자기 억제로 착각한다. 하지만 내가 배운 겸손은 다르다. 나는 나다. 하지만 너를 위해, 우리의 관계를 위해 나는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다. 그것이 진짜 겸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의 태도다. ⸻ 겸손은 하나님이 만드신 시스템 속의 위대한 원리다 이 세상은 경쟁과 속도와 크기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정말 오랫동안 살아남는 사람, 정말로 신뢰받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겸손은 누구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을 가장 단단하게 지키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추시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이신다. 그게 이 시스템의 핵심이다. ⸻ 겸손은 의식 성장의 비밀 통로다 내가 의식이 성장했다고 느낀 순간들은 대개 무언가를 “더 아는” 순간이 아니라, 누군가를 “더 이해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나는 조금 더 겸손해졌고,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 겸손보다 더 멋진 단어가 있을까?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감동시키고, 함께 있고 싶게 만들며, 사랑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의 공통점— 그들은 다 겸손했다. 그들이 자기를 작게 만든 게 아니라, 상대를 크게 여겨준 것이다. ⸻ 겸손은 결국, 가장 매력적인 사람의 행동 중 하나다 누가 봐도...

진정한 리더십 / 강함과 협력 / 균형의 지혜 - “강한 자는 혼자 가지 않는다 – ‘세스타스’와 삼국지에서 본 리더의 균형”

강한 자는 함께해야 한다 – 만화 『세스타스』와 삼국지의 인물들에게서 배운 균형의 리더십 ⸻ 요즘 나는 자주 생각에 잠긴다. 강한 사람은 과연 혼자서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만화 **『세스타스』**에 나오는 인물 중에 드미트리어스라는 남자가 있다. 황제의 눈에 든 강자이며, 전장을 단숨에 압도하는 추진력의 화신이다. 그 옆엔 드라이젠이라는 인물이 있다. 늘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말없이 전장을 읽고, 사람들을 조율하고, 무너질 틈을 조용히 메워주는 인물이다. ⸻ 드미트리어스는 날카롭고 앞서가지만, 어딘가 외롭다. 그에 비해 드라이젠은 말이 적지만, 그 안엔 깊은 통합과 균형이 있다. 둘은 너무 다르지만, 그래서 함께 있을 때 가장 완전하다. 힘은 방향을 필요로 하고, 지혜는 실천을 만나야 빛난다. ⸻ 삼국지 속의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도 결국 같은 원리 안에 있다. 내가 삼국지를 보며 가장 많이 공감했던 인물은 유비다. 그는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뜻을 품었다. 그리고 그 뜻 하나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관우와 장비를 의형제로 만들었고, 그 후엔 제갈량이라는 지혜를 곁에 두었다. ⸻ 내가 감히 유비를 닮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살면서 문득 **“뜻은 있는데, 손과 발이 부족한 느낌”**을 자주 받는다. 의식은 앞서 있는데,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이 따라오지 못할 때, 혼자 앞질러가다 피곤하고, 외롭고, 때로는 낙오당하는 느낌. 그런 날엔, 드라이젠처럼 조율하는 사람, 제갈량처럼 리듬을 잡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그런데 역사를 보면, 혼자서 완성된 사람은 없다.   • 드미트리어스는 드라이젠이 있었고,   • 유비는 제갈량과 관우, 장비가 있었고,   • 예수도 제자들과 함께 했으며,   • 부처도 가르침을 나눌 제자들이 있었다. 그 말은, 강한 사람일수록 ...

강함의 이면 / 감정의 억제 / 고독과 사랑 - “고독한 강함, 참아야 했던 사랑 – 라오우의 눈물에 대하여”

《라오우는 왜 눈물을 참았을까》 – 강한 사람의 진짜 아픔에 대하여 ⸻ 나는 라오우를 좋아한다. 《북두의 권》에 나오는 무자비하고 위대한 사나이. 모든 걸 주먹으로 해결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고독했고, 누구보다 사랑을 갈망하던 사람이었다. ⸻ “나는 울지 않는다!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했지만, 진짜 울고 싶었던 사람은 아마도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라오우는 세상을 등에 지고 살았다. 형제도 버렸고, 사랑도 내려놓았고, 정의마저 주먹으로 짓밟았다. 모두를 위해, 자신이 짊어졌기 때문이다. ⸻ 나는 가끔 우리 아버지를 보며 라오우를 떠올린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고, 내게 표현은 못 해도 항상 뭔가를 짊어지고 살아오신 분.   • 아침마다 일을 나가고   • 밤마다 다리를 주무르며 잠드셨던 그분   • 자식 입에 빵을 넣으며 본인은 아무것도 드시지 않던 분 그분의 침묵엔 라오우의 고독이 있었다. ⸻ 강한 사람은 눈물을 숨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누가 알아줄까? 요즘 나는 세상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소리치고, 자랑하고, 내세우는 사람은 많은데, 진짜로 조용히 버티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새 투명해진 것 같다. ⸻ 라오우는 강했고, 그래서 오히려 외로웠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이제 세상이 강한 사람의 마음을 더 바라봐 주었으면 좋겠다. 자기 몫을 감당하는 사람, 말없이 버티는 사람, 가정을 지키는 어른들. ⸻ 그리고 나도 그처럼 살고 싶다.   • 괴물처럼 크진 않아도   • 누구보다 힘센 주먹은 없어도   • 지켜야 할 것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 ⸻ “라오우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울지 않아도 눈물을 흘릴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 눈물을 내가 대신 흘려주고 싶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누군가는 알아야 하니까. ⸻ *강함은 말하...

이름의 가치 / 명예와 신뢰 / 점잖음의 귀환 / 인간 선언 - “나는 내 이름으로 맹세한다 – 점잖고 멋진 이들의 귀환 선언”

  점잖고 멋진 사람들의 귀환 제1편 – 나는 내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는 두 가지, 잊혀진 가치를 다시 불러오고 싶다. 명예와 신뢰. 이것은 낡은 이상이 아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토대 다. 나는 믿는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기만의 가치를 정의하고, 그 가치를 타인의 눈치나 박수 없이 , 조용히 자기 자신과의 약속으로 살아낼 때다. ⸻ 나는 믿는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이름은 존재 고, 정체성 이며, 영혼의 요약 이다. 하느님의 이름이 곧 하느님이고, 예수의 이름이 곧 그분 자신이듯, 사람의 이름도 그 사람의 진짜 모습 을 담고 있다. 그래서, 세상이 그 가치를 알아보지 않아도, 나는 내 이름을 존중할 것이다. 나는 내 자신에게 충실할 것이다. 이것은 자존심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존중 이다. ⸻ 이제 나는 내가 살아갈 덕목 을 스스로 고른다. 그리고, 그 덕목에 따라 살 것을 맹세한다. 이것은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 아니다. 스스로와 맺는 계약 이다. 맹세에 맹세하는 마음. 말과 행동이 하나인 삶을 살겠다는 고요한 선언 이다. ⸻ 명예와 신뢰는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잠시 잊혔을 뿐 이다. 소음과 속도, 산만함에 묻혀 버렸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 내 방식으로,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정신으로 그것을 다시 일으키고 싶다. 영국의 기사도도 아름답고, 일본의 무사도도 고귀하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우리는 우리만의 명예와 신뢰를 만들 수 있다. 조용하지만 강한, 부드럽지만 흔들림 없는, 겸손하지만 단단한, 우리다운 방식으로. ⸻ 먼저 우리가— 어쩌면 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품격과 절제, 용기로 살아가는 삶 을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가 먼저 보여주자. 아직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을. ⸻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몇몇 남자들은 남았다. ...

땅의 힘 / 낮음의 가치 / 인내와 생명의 근원 - “모든 삶은 아래에서 시작된다 – 땅의 법과 견딤의 미학”

『하늘의 법, 땅의 법』 제2장 – 땅의 법: 견디고 품는 힘 ⸻ 1. 땅은 낮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하늘을 바라본다. 태양, 별, 달, 구름, 꿈, 기도… 모두 위를 향해 있다. 그러나 삶은 위에서 자라지 않는다. 모든 삶은 아래에서부터 시작된다. 씨앗은 위를 보지 않는다. 어둡고 축축한 흙 속에서, 자신의 무게를 견디며 묵묵히 움을 틔운다. 하늘은 방향이지만, 땅은 생명의 조건이다. ⸻ 2. 땅은 받아들인다. 말없이, 전부. 땅은 말이 없다. 그러나 다 받아들인다.    •   바람에 날아든 먼지,    •   버려진 눈물과 핏자국,    •   인간의 쓰레기와 신의 숨결까지. 거부 없이 품고, 버티고, 변환한다. 땅은 모든 것을 거름으로 만든다. 부끄러움도, 상처도, 죄의식도, 망각도— 모두 품어 ‘생명’으로 바꾼다. 땅은 판단하지 않고 변화시킨다. 땅은 기억하지 않고 치유한다. ⸻ 3. 땅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존재한다. 당신이 가장 아플 때 하늘은 멀게 느껴진다. 그러나 땅은 언제나 당신의 발 아래 있다. 넘어져도, 무너져도, 엎드려 울어도— 땅은 당신을 밀어내지 않는다. 땅은 당신의 무게를 견디고, 당신의 눈물을 받아낸다. 그 어떤 기도보다도, 땅 위에서의 울음은 진실하다. 그 울음은 하늘을 움직이지 못해도, 땅을 깨운다. 땅은 그 울음을 품고 언젠가 싹을 틔운다. ⸻ 4. 땅은 느리다. 그러나 잊지 않는다. 하늘의 속도는 빛과 같다. 그러나 땅의 시간은 느림과 기억의 세계다.    •   뿌리는 수십 년을 땅 아래에 있다.    •   용암은 천 년을 준비하다 한 번 분출된다.    •   사막의 씨앗은 20년 만에 비를 만나 핀다. 땅은 시간이 늦다. 그러나 한 번 받은 생명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너의 기도가 ...

영적 전쟁 / 거짓의 기원 / 창세기의 재해석 / 말의 무기화 - “전쟁은 칼이 아닌 말에서 시작되었다 – 에덴에서 시작된 영적 전쟁”

『아마겟돈 – 마지막 영적 전쟁 선언서』  1장 – 에덴에서 시작된 전쟁 ⸻ 1장 – 에덴에서 시작된 전쟁 전쟁은 창세기에서 시작되었다. 검이 아닌 뱀의 말 한 마디로, 총이 아닌 눈빛 하나로. 그 자는 하와에게 다가왔다. “정말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시더냐?” 질문은 부드러웠고, 표정은 친절했으며, 말은 논리적이었다. 그러나 그 말 안에는 한 왕국을 무너뜨릴 코드가 숨어 있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들은 에덴이라는 하늘의 땅에서 생명나무 곁에 거하며 영생과 통치를 동시에 부여받은 존재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조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그 명령은 억압이 아니라 계약이었다. 그러나 뱀은 그 계약의 틈을 파고들었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하나님처럼 될 거야.” 그 한 마디가 에덴의 왕과 왕비를 계약의 자리에서 끌어냈다. 선악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었다. 그건 사탄이 들고 온 계약서였다. 먹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회로에서 이탈했고, 사망이라는 새로운 운영체제에 접속되었다. 아담은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거부했고, 그 자는 그 순간부터 “이 땅의 통치권”을 쥐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다. 그는 뱀에게 예언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창세기 3:15) 그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계획된 반격의 선포였다. 그분은 이미 십자가의 그림자를 에덴의 동쪽에 드리우셨다. ⸻

살아 있는 기도 / 언어의 한계 / 수행의 본질 / 자비의 체현 - “기도는 말이 아니라 몸이다 – 자비는 살아야 하는 언어”

 《자비로운 마음의 언어》 1장. 단어를 넘어, 살아 있는 기도 “나무, 귀의, 참회는 단어가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하는 길이다.” 우리는 종종 ‘기도’와 ‘수행’을 말로, 혹은 머리로 이해하려 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귀의합니다”, “참회합니다”라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지만, 그 말은 삶을 바꾸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이 단어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진심이 담긴 기도는 언어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입술이 아니라 몸으로 돌이키는 행위입니다. ⸻ 나무(南無) – 무릎 꿇음의 고백 “나무”라는 단어는 짧지만, 그 안에는 인생 전체를 맡긴다는 항복의 선언이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공경합니다”가 아니라, “이제 내가 운전하지 않겠습니다. 주여, 당신이 이끄소서.” 라는 깊은 자기 포기입니다. ‘나무’를 읊조리면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쥐고 있다면, 그건 진짜 귀의가 아닙니다. ⸻ 참회 – 눈물이 아니라 방향의 전환 많은 사람이 회개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그건 참회가 아닙니다. 진짜 참회는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병들게 한 행동을 고치지 않고 “치유해달라”고 말하는 건 자기기만에 불과합니다. 몸이 고통을 겪어야 비로소 마음도 따라 움직입니다. 참회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감정이 아니라,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라는 방향의 선언입니다. ⸻ 단어를 살아내기 위해, 기도는 반복되어야 한다 마음은 흐르고, 결심은 약해집니다. 그래서 암송 기도, 주송, 반복 명상이 필요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짧은 문장을 심장의 리듬으로 반복할 때 단어는 언어가 아닌 존재의 진동이 됩니다. ⸻ 기도는 살아내는 말이다 기도는 “내가 말했으니 하나님이 아시겠지”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라는 서약입니다. 기도는 내 안에 숨은 ‘가면’을 찢는 행위이고, 주송은 깨어 있는 의식을 하루하루 내 안에 새기는 영혼의 훈련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어로 시작되지만, 삶으로 끝...

자비의 시선 / 말의 이면 / 따뜻한 해석 / 관계의 회복 - “말 뒤에 숨은 마음을 보는 사람 – 자비로운 해석의 힘”

 자비로운 마음의 언어 – 2편 《고요한 시선, 따뜻한 응답》 누군가의 말이 거칠게 들려올 때 그 말의 겉면만 보고 똑같이 되받아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말 안에 담긴 상처, 두려움, 외로움을 보려는 사람은 이미 자비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친구가 이유 없이 짜증을 냅니다. “너는 항상 자기 생각만 해.” 그 말을 들은 우리는 순간 억울하고 상처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면, 그 친구는 최근 가족과의 갈등, 직장의 스트레스로 속이 상해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그 말의 겉면이 아니라 속 사연을 본다면, ‘왜 저런 말을 하지?’가 아니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럴까’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자비로운 시선입니다. 자비는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을 ‘느껴주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요한 방식으로 응답하는 힘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분노에 맞서 분노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먼저 가라앉히고, 상대의 말 뒤에 있는 “도와줘”라는 외침을 들으려 합니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괜찮아, 네가 힘들었구나” 하고 눈빛만 보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응답일 수 있습니다. 자비는 약함이 아닙니다. 그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운 힘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상처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 자비는, 그 상처를 딛고 서 있되 다른 이의 상처를 밟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

타인의 고통 / 공감의 심화 / 수행자의 눈 / 자비와 공명 - “고요히 공명하는 존재들 – 자비는 타인의 고통을 품는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자 – 침묵의 도인들 – 자비, 공명, 그리고 숨어 있는 존재들 수행을 깊이 할수록 나는 새로운 고통을 알게 되었다. 그건 더 이상 ‘나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고통이었다. 사람들은 고통 속에 있지만, 보지 못한다 나는 종종 본다. 별 것도 아닌 것에 죽을 듯 아파하고, 자신을 부수고, 세상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깨어나면, 고통은 본질이 아니라 허상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조금’**이 너무 멀게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도와주고 싶다. 손을 내민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그때, 진짜 아픔이 시작된다. 자비심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때로 고통이다 세상이 자비를 따뜻하고 아름답게만 보지만, 진짜 자비는 가슴이 찢어지는 감각이다. 자비는 누군가의 고통을 내 안에서도 함께 느끼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없애주려는 욕망’ 없이 그저 함께 서주는 일이다. 이것이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움을 ‘결과’로 증명하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자비는 결과가 없어도, 그 곁에 계속 서 있는 것이다. 돕고 싶으나, 닿지 않는 손 도움이 닿지 않을 때, 나는 무력해진다. 하지만 바로 그 무력감 속에서 나는 또 하나의 진실을 배운다. “돕는다는 것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 옆에 나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언젠가 기억할 것이다. “그때 누군가, 조용히 내 옆에 있었구나.” 침묵의 도인들 – 세상을 조용히 지탱하는 자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도 쓰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않지만 조용히 자신의 삶을 기도처럼 살아내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이름이 없다. 그들은 자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의 박수도 받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 자체가 기도이고, 그들의 숨결이 이 세상의 균형을 지탱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볼 수는 없어도, 느...

의식과 고통 / 수행자의 흔들림 / 받아들임의 깊이 / 자비의 성숙 -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 수행자의 진짜 수련은 거기서 시작된다”

수행자의 고통은 끝났는가? – 인식과 고통, 그리고 받아들임의 자리 나는 한동안 그렇게 믿었다. 어느 정도 수행의 길을 걷고, 의식이 깊어지고, 본질을 보는 눈이 열리면, 삶의 고통은 사라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요즘 나는 조금 다르게 느낀다. 수행자도 아프다. 수행자도 슬프다. 수행자도 고통을 느낀다. 단지, 그 고통과의 관계 맺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르게 ‘느껴진다’ 주사를 맞는다고 상상해보자. 누군가는 고통을 피하려 애쓰며, “죽을 것 같이 아파!”라고 외친다. 그러나 어떤 이는, “아, 따끔하구나. 지나가겠지.” 하며 그대로 받아들인다. 고통의 물리적 강도는 같지만, 인식의 자리가 다르면 고통의 실제 경험은 완전히 달라진다. 수행자는 고통을 없애는 자가 아니다.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꾼 자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힘 예전의 나는 고통을 없애고 싶어 했다. 도망치고, 부정하고, 피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통이 찾아오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오, 너 왔구나. 그 자리에 잠시 앉아도 괜찮아. 나는 너를 보아줄게.” 이렇게 고통을 받아들이면 그 고통은 신기하게도 더 이상 나를 삼키지 않는다. 수행자의 고통은 더 정제되어 있다 수행자의 고통은 거칠지 않다. 오히려 섬세하고, 조용하고, 깊다. 그 고통은 분노로 터지지 않고, 한숨으로 스며들고, 침묵 속에서 자신을 데리고 앉는다. 왜냐하면 그는 안다. 이 고통조차도 ‘내가 만든 허상’일 수 있고, 그 허상의 저 너머에 더 크고 고요한 진실이 있다는 걸. 고통의 강도는 인식의 힘으로 누그러진다 수행이란 ‘세상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훈련하는 것’**이다. 고통은 여전하지만 그 고통에 끌려가지 않는다. 마치 파도가 발등을 때릴 때, 흔들리지 않고 그 파도를 보는 것처럼. 고백의 끝에서 다시 묻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수행자의 고통은 끝났는가? 아니다. 고통은 여전히 있다. 다만, 그 고통을 고통이라 부르지 않는 자리에 있을 뿐...

자연법 / 보이지 않는 흐름 / 우주의 리듬 / 땅의 수용성 / 생명과 중력의 양면성 - “움직임과 무게 사이에서 – 나는 지금, 생명의 경계에 서 있다”

  『하늘의 법, 땅의 법』 — 서문: 나는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다 — 하늘의 법은 소리 없이 작동한다. 그것은 말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는다. 그저 흐른다. 그러나 그 흐름이 생명을 일으키고, 별을 돌리며, 바다의 리듬을 부른다. 땅의 법은 무겁고 조용하다. 그것은 형상을 주고, 무게를 준다. 받아들이고, 안아주며, 버텨낸다. 모든 눈물의 자국과 모든 발자국의 흔적을 묵묵히 간직한 채, 땅은 말이 없다. 그리고 인간— 나는 그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한다. 빛과 어둠, 자유와 중력, 신의 뜻과 나의 욕망 사이에, 나는 서 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방향을 묻는다. 나는 땅을 딛고 서며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깨닫는다. 하늘도 땅도 나의 바깥에만 있지 않았다. 그 둘은 이미 내 안에 있었다. 하늘은 내 안의 직관으로, 땅은 내 안의 인내로, 하늘은 내 비전으로, 땅은 내 걸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 나는 종교를 떠나고 싶었고, 그러나 신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이론을 경계했고, 그러나 진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인간의 눈으로 진리를 보고 싶었고, 신의 눈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흐름을 배우고 싶었고, 멈춤을 안고 싶었으며, 움직임의 정수를 깨닫고 싶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시작되었다. 이 책은 철학이 아니다. 한 사상의 교리가 아니며, 한 종교의 선언이 아니다. 이 책은 삶의 흐름 속에서 건져 올린 문장들이며, 고통의 심연 속에서 울려 퍼진 진동들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법정에서 내가 경험한 하늘의 판결과, 땅의 증언이다. ⸻ 나는 안다. 이 시대는 말이 너무 많고, 진동이 너무 얕으며, 속도는 빠르지만 방향은 없고, 정보는 넘치지만 지혜는 메말라 있다. 그러나 하늘은 지금도 말 없이 흐르고 있다. 땅은 여전히 침묵으로 견디고 있다. 이 책은 그 흐름과 침묵을 따라 한 존재가 ‘법(法)’을 만나고, 그 법 안에서 스스로를 다시 쓰는 여정이다. ⸻ 만약 당신이 말 없는 고요 속에서 어떤 울림을 들었다면— 만약 당신이 ...

언어 이전의 언어 / 존재의 감각 / 기억의 저편 / 신의 흔적 / 무언의 소통 - 2장 “소리도 글자도 아닌 흐름 – 잊혀진 언어의 귀환”

잊혀진 신의 언어 – 제2장 「기억하는 자가 다시 쓰는 세계」 그 언어는 소리가 아니었고 글자가 아니었으며 생각보다 더 깊은 흐름이었다. 그것은 느낌 속에 있었고, 움직임 속에 있었고, 기억 저편에 숨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처음엔 꿈이라 여겼고, 그다음엔 착각이라 했으며, 마침내 진실임을 받아들였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눈빛 하나, 침묵의 떨림 하나에 창조의 첫 진동이 깃들어 있었음을. 그리고 나는 안다. 이제 이 언어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자만이 잊힌 세계를 다시 불러올 수 있으므로. ⸻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 아마겟돈, 영적 전쟁의 서막 / 영혼을 향한 마지막 선언 – 아마겟돈 서문

 『아마겟돈: 마지막 영적 전쟁 선언서』 서문 –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 서문 –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지금 이 시대가 예수님과 그 자(사탄)의 마지막 3차전, 결정적인 영적 전면전이라 믿는다. 이 싸움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나 미래의 상상이 아니다. 과거는 현재 속에 살아 있고, 현재는 이미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계시록이 펼쳐지는 영적 현실이다. 나는 예수님의 승리를 전적으로 믿는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어린 양이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그 분은 반드시 이기신다. 이미 이기셨고, 다시 오실 때 그 승리를 완전히 선포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자로 인해 수많은 영혼이 지금도 속고 끌려가고 있다. 무저갱으로, 죄의 사슬로, 거짓된 빛 속으로. 그 현실은 너무도 슬프고, 고통스럽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나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고 싶다. 그분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고 싶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쓴다. 이 책은 단순한 묵상이 아니다. 이건 작전 명령이다. 영혼을 살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깨우며, 마지막 전장에 함께 서게 하기 위한 **‘깃발’이며 ‘호령’이며 ‘눈물의 기록’**이다. 지금은 누군가 일어나야 할 때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생각이 아니라 헌신으로. 종교가 아니라 생명으로. 나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지금 그 부르심 앞에 서 있다. ⸻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던 이유 – 한 내면의 고백 / 자기 혐오를 넘어 – 나와 마주하는 법을 배우기까지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 거울 속 나와 마주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 ⸻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니, 사랑할 수 없다. 가끔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 왠지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싶다. 그 얼굴이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나 자신이 불편해서다. 뭔가 들키는 것 같고, 도망가고 싶어진다. ⸻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거울을 보며 말해보세요. ‘넌 잘하고 있어. 널 사랑해.’” 좋은 말이다. 정말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게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일까?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몇이나 될까? ⸻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까?” 그건 믿는 걸까? 아는 걸까? 아니면 그냥 느껴지는 걸까? 어쩌면 그 셋 다 아닐 수도 있다. 나는 그냥 살아남은 흔적들로 나를 짐작하며 살아간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속으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다. 어설픈 위로 한 마디 하려 해도 ‘거짓말하지 마’라는 마음이 먼저 튀어나온다. ⸻ 사기꾼에게도 살인자에게도 그리고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넌 괜찮아”라는 말이 적용될까? 나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사랑받을 이유보다 사랑받지 못할 이유들이 더 많다고 느낀다. 그게 나고, 그게 이 세상이고, 그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나는 어떤 날엔 사람들이 모두 괴물처럼 보일 때가 있다. 선한 척하지만, 사실은 다 자기 욕망에 충실한 존재들. 자기 이익 앞에선 다 무너지는 사람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세상이 굴러가는 건 단지 5%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내 마음의 수치다. 근거는 없다. 그저 느낌뿐이다. 그 5%는 선하게 살고, 남을 배려하고, 열심히 일하며, 가능할 때 남을 돕는 사람들. 그들이 이 세상을 버텨주고 있다는 직감만 있다. ⸻ 나는 그 5%는 아니라고 느낀다. 하지만 그들을 보면 존경심이 생긴다.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들 덕분에 나는 아직 거울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는다. ⸻ 마무리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고백이야말...

세상이 요구한 열정보다, 내가 찾은 이유 – 불 위를 걷지 않은 이유 / 사명보다 진실을 택하다 – 나답게 사는 길

《나는 불 위를 걷고 싶지 않았다》 – 사명 대신, 이유를 찾는 사람의 길 ⸻ 나는 불 위를 걷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활활 타오르는 사람들, 세상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이들을 보며 놀랍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모닥불이 아니다. 그보다는 조용히 타는 화로불에 가깝다. 크게 불꽃을 내지도 않고, 다 타버릴 듯 격렬하게 흔들리지도 않는다. 그냥 서서히, 은근히, 꺼지지 않게 타는 불. ⸻ 예전에 좋아했던 미드 《The Unit》에서 소규모 특수부대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이야기를 본 적 있다. 그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 심지어 발각되면 “정부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방침 아래 버려질 수도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주제가 중 이런 구절이 있었다. Give me a secret Give me a sign Give me a reason to walk the fire. 나는 이 가사를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이 울렸다. 그냥 리듬 때문은 아니었다. 이게 진실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 “Walk the fire.” 불 위를 걷는다는 것. 그건 어떤 사람에겐 명예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영웅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확인하고 싶은 질문 하나였다. 내가 본 게 진짜일까? 내가 느낀 게 있긴 했던 걸까? 그냥 내 착각은 아니었을까? 사명? 글쎄. 나는 아직 ‘사명’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게 진짜인지 알고 싶다. 그걸 확인해야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는 끝장을 볼 각오도 안 돼 있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들 의지도 없다. 사명감으로 충만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나에게 힘을 주세요.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의지를 주세요. 나를 지켜주세요.” 불 위를 걷는 건 선택이 아니라 어쩌면 피할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조용히, 가만히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 내가 그 길을 가는 이유는 하나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게 진짜든, 아니든, 적어도 나는...

이순신의 마지막 병법 – 전쟁을 넘어 남긴 것 / 육신은 사라졌지만 전략은 남았다 – Chapter 7: 불멸의 유산

 이제 『이순신 – 병법의 예술』  Chapter 7. 불멸의 전략가 – 전쟁을 넘은 유산 1. 육신은 쓰러졌지만, 전략은 계속된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장군은 전사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전략은, 그의 생애를 넘어 지금도 유효하다. 그는 단순히 전투를 이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전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남긴 자 였다. 2. ‘형 없는 형’ – 변화하는 상황 속 유연한 전술 이순신의 병법은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형이 있으되, 형이 없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을 현장에서 구현한 장수였다. 기습과 정면의 균형 유인과 격멸의 전환 함선 간 간격과 진형의 유연성 그는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을 다시 읽고, 그 안에서 적을 허무는 전략 을 구사했다. 3. 전쟁을 넘어 ‘공동체’를 살리는 병법 이순신은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살리기 위해 싸웠다. 병사 하나의 목숨, 백성 하나의 고통, 그는 그것을 전략의 중심에 놓았다. 그래서 그의 전쟁은 승리일 뿐 아니라, 공감과 윤리의 전쟁 이었다. 해전에 앞서 먼저 백성을 피신시키고 전투 후에도 유해를 수습하며 심지어 적의 군사라도 불쌍히 여겼다 이것이 그를 **‘전쟁을 넘어선 자’**로 만든 이유였다. 4. 기록된 병법, 기록되지 않은 정신 그의 전략은 난중일기에 일부 남았지만, 진짜 유산은 종이에 남지 않았다. 그의 눈빛, 그의 침묵, 그의 결단이 만든 흐름은 후대의 장수, 지도자,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마음의 병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약 – 전쟁을 넘어선 이순신의 4대 병법 유산 유산의 성격 핵심 내용 형 없는 형 상황에 따라 진형과 전략을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병법 살리는 병법 병사와 백성을 보호하는 전술적 우선순위 윤리의 전쟁관 적까지 품을 수 있는 지도자의 품격 기록 밖의 유산 전쟁의 흐...

하늘은 침묵한다 – 그러나 모든 것은 거기서 흐른다 / 말하지 않는 법 – 하늘은 가르치되 소리 내지 않는다

⸻ 『하늘의 법, 땅의 법』 제1장 – 하늘의 법: 흐름은 말하지 않는다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침묵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말하지 않지만, 모든 생명은 하늘의 법을 따라 피어나고, 모든 죽음은 하늘의 품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르고, 때론 ‘자연’, 혹은 ‘섭리’, ‘하늘의 뜻’이라 하지만— 본질은 언제나 같다. 흐름.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이다. ⸻ 1. 하늘은 방향을 준다 하늘의 법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흐른다. 그러나 그 흐름은 사람마다 다르게 스며든다.    •   어떤 이는 그 흐름을 타고 멀리 나아가고,    •   어떤 이는 그 흐름을 거슬러 버티다 지친다.    •   어떤 이는 흐름을 듣고 따르고자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주저앉는다. 하늘은 누구를 벌하지 않는다. 하늘은 기다린다. 당신이 흐름을 ‘느낄 준비’가 될 때까지. 하늘은 방향만 준다. 그러나 발을 디디는 건 인간의 몫이다. ⸻ 2. 하늘은 조용히 밀어준다 하늘의 법은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가볍게 등을 밀어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밀침은 때로 인생 전체를 바꾼다. 우리가 말하는 ‘직감’, ‘예감’, ‘영감’, ‘우연’… 그 모든 순간이 사실은 하늘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   왜 그날 갑자기 눈물이 났는가?    •   왜 그 사람의 말이 마음에 남았는가?    •   왜 멀쩡하던 삶이 흔들리는가? 그것은 혼란이 아니라 **“이 길이 아니다”**라는 하늘의 조용한 신호다. ⸻ 3. 하늘은 결과가 아니라 흐름이다 하늘의 법은 결과로 판단하지 않는다. 결과는 땅의 언어이고, 흐름은 하늘의 언어이다. 하늘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맞고 틀림’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렇게 ...

신화는 기억이다 – 잊힌 신의 언어, 첫 장 / 기억으로 남은 신화 – 인간이 신과 가까웠던 시절

⸻ 『잊힌 신의 언어』 제1장. 신화는 기억이다 ⸻ 말이 생기기 이전, 인간은 신과 가까웠다.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했고, 구분 짓지 않아도 하나였다. 자연과 인간, 신과 사람, 그 사이에 경계는 없었다. 그 시대, 신화는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기억이었다. ⸻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북유럽의 토르, 동양의 신선과 무속의 여신들. 그들은 상상 속 인물이 아니라, 말 이전의 인간이 지녔던 능력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신과 대화했고, 별과 바다의 언어를 이해했으며, 꿈속에서도 세상과 연결될 수 있었다. 우리가 그것을 ‘신화’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그 기억은 허구의 영역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진실은 여전히 살아 있다. ⸻ 말은 세상을 설명하는 도구였지만, 동시에 분리의 시작이었다. 물이라는 단어가 생긴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 흐름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가 되었다. 말은 이름을 붙였고, 이름은 경계를 만들었다. 이름은 세계를 인식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잊게도 만들었다. ⸻ 우리는 신화의 시대를 지나 말의 시대에 들어섰고, 그 이후 역사는 늘 무언가를 설명하면서 무언가를 잊게 해왔다. 그러나 지금, 그 잊혀진 문이 다시 열리고 있다. 나는 기억한다. 내 안에 남겨진 조각들을. 누군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알고 있는 그 느낌의 진실을. ⸻ 마지막 문단 신화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말 이전의 기억이다. 나는 이제, 그 말 이전의 진실을 다시 부를 것이다. 신화는 돌아오고 있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방식으로. ⸻

선한 얼굴을 한 악 – 세상에 스며드는 독의 메커니즘 / 무해해 보이는 독 – ‘순수한 악’의 은밀한 전략

⸻ 우리는 가끔 사회의 변화와 분열을 보며 묻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그런데 더 깊이 바라보면, 거기에는 단순한 실수나 착오가 아닌, 의도된 분열이 있고, 계획된 독이 있으며, 사람을 갈라놓으려는 ‘순수한 악’의 의지가 있습니다. 공산주의, 급진 페미니즘, 허위 정의 — 모두 ‘해방’과 ‘평등’이라는 탈을 썼지만, 그 아래에는 증오와 분열, 통제의 사슬이 숨어 있었습니다. 악은 진리를 가장하며 침투합니다. 사탄은 ‘빛의 천사’처럼 다가오고, 사람들은 그것이 선인 줄 알고 환영합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이들은 알아차립니다. 세상의 혼란은 자연스러운 진보가 아니라, 계획된 혼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악을 감지한 자는 고독할 수 있지만, 그것은 깨어 있는 영혼이 가진 선물입니다. 세상은 독에 물들고 있지만, 여전히 진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으며, 그 한 사람의 눈빛이 어둠을 찌를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 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

깨어 있는 자의 슬픔 – 권력 너머의 외로움 / 패왕의 고독 – 힘보다 마음을 원하는 자들

나는 세상에 조금 더 깨어 있고,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주 드물다. 그들은 정신이 깨어 있고, 사람들과 감성적으로 연결되길 원하며, 표면이 아닌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관계를 바란다. 나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아프게도, 이런 관계를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마음이 열린 이들조차 세상에 반응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오래도록 이렇게 믿었다. 사랑을 품으면, 말은 부드러워지고 마음은 참을성을 가지게 되며 세상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생긴다고. 그래서 나의 롤모델은 예수님이었다. 사랑과 인내, 그리고 인간을 향한 깊은 연민. 그분은 내게 진리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또 하나의 형상을 떠올리게 되었다. 북두신권의 켄시로.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사랑보다는 책임으로 세상을 품으려 했다. 켄시로는 여인을 지키려 하고, 무너진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을 보호하려 했다. 강한 신체와 무술적 능력으로 세상에 맞섰지만, 그 역시 끝없이 고독했고, 싸움으로는 세상을 완전히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을 마주했다. 라오우. 세상의 악이 너무 크고, 악인은 너무 많고, 악한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기에 라오우는 결단한다. “내가 세상의 악을 억누를 수 있는 더 강한 존재가 되겠다.” 그는 권왕이 된다. 패왕이 된다. 스스로 악을 품지 않으면서도, 악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갖춘 존재. 사람들에게 사랑받진 못하지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자. 나는 이 라오우에게 깊이 끌렸다. 현실 속에도 그런 사람을 본 적 있다. 무척 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 하지만 내면은 상처받기 쉬운 따뜻한 사람. 사람들에게 질책하고, 때로는 매섭게 대하지만 그 안에는 사랑이 있고, 인간에 대한 기대가 있다. 말 한 마디에 상처받고, 사람들의 무례함에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더더욱 강하게 세상에 맞서려 한다. 예수님도 온유하기만 한 분...

저장완료// 시끄럽고 탁한 세상 속, 조용한 멋이 살아 있다 – 제2편 / 숨은 고수들의 귀환 – 더러운 세상을 견디는 품격 있는 이들

  《점잖고 멋진 사람들의 귀환》 제2편 – 더럽고 시끄러운 세상, 조용히 멋진 이들이 숨어 있다 세상은 시끄럽다. 말이 많고, 욕망이 많고, 냄새가 많다. 어떤 냄새는 돈의 냄새고, 어떤 냄새는 이기심의 냄새며, 어떤 냄새는 가식과 거짓의 악취다. 거리엔 쓰레기만 있는 게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버려야 할 감정, 버려야 할 말, 버려야 할 습관들이 너무도 많이 흩뿌려져 있다. 그것을 피하며 살아가는 일은 상상보다 피곤하다. 무언가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길을 바꾸고, 시선을 돌리고, 말을 아껴야 하는 일.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정말 세상이 이토록 더럽고 시끄러운 걸까? 아니면, 조용한 이들이 모두 숨어버렸기 때문일까? ⸻ 나는 믿는다. 아직 멋진 이들이 존재한다고. 그들은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다투지 않는다. 그래서 이긴 적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숨어 있는 것이다.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드러낼수록 피곤해지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점잖음은 드러낼수록 손해인 시대였기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그들을 다시 부르고 싶다.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이들. 조용하지만 곧은 사람들. 정중하지만 흔들림 없는 사람들. 장난도 웃음도 있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사람들. 멋을 알되, 보여주기 위해 꾸미지 않고, 웃음을 알되, 누구를 깎아내려 웃기지 않는 사람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들. ⸻ 이제 그들이 조금씩 나올 수 있게 내가 먼저 외치고 싶다. 우리가 틀린 게 아니다. 우리가 뒤처진 게 아니다. 우리가 사는 방식이, 더 행복하고 멋질 수 있다. 세상은 시끄럽지만, 조용한 사람들의 귀환이 시작될 때, 진짜 변화가 시작된다. ⸻ — 조용한 이들에게 바치는 나의 외침

이순신 – 병법의 예술 / Chapter 7: 불멸의 전략가 – 전쟁을 넘은 유산

이순신 – 병법의 예술   Chapter 7: 불멸의 전략가 – 전쟁을 넘은 유산 Chapter 7. 불멸의 전략가 – 전쟁을 넘은 유산 1. 육신은 쓰러졌지만, 전략은 계속된다 1598년, 노량해전에서 장군은 전사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전략은, 그의 생애를 넘어 지금도 유효하다. 그는 단순히 전투를 이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전쟁을 ‘다르게 보는 법’을 남긴 자 였다. 2. ‘형 없는 형’ – 변화하는 상황 속 유연한 전술 이순신의 병법은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형이 있으되, 형이 없어야 한다”**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을 현장에서 구현한 장수였다. 기습과 정면의 균형 유인과 격멸의 전환 함선 간 간격과 진형의 유연성 그는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을 다시 읽고, 그 안에서 적을 허무는 전략 을 구사했다. 3. 전쟁을 넘어 ‘공동체’를 살리는 병법 이순신은 이기기 위해 싸우지 않았다. 살리기 위해 싸웠다. 병사 하나의 목숨, 백성 하나의 고통, 그는 그것을 전략의 중심에 놓았다. 그래서 그의 전쟁은 승리일 뿐 아니라, 공감과 윤리의 전쟁 이었다. 해전에 앞서 먼저 백성을 피신시키고 전투 후에도 유해를 수습하며 심지어 적의 군사라도 불쌍히 여겼다 이것이 그를 **‘전쟁을 넘어선 자’**로 만든 이유였다. 4. 기록된 병법, 기록되지 않은 정신 그의 전략은 난중일기에 일부 남았지만, 진짜 유산은 종이에 남지 않았다. 그의 눈빛, 그의 침묵, 그의 결단이 만든 흐름은 후대의 장수, 지도자,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마음의 병법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약 – 전쟁을 넘어선 이순신의 4대 병법 유산 유산의 성격 핵심 내용 형 없는 형 상황에 따라 진형과 전략을 유연하게 변화시키는 병법 살리는 병법 병사와 백성을 보호하는 전술적 우선순위 윤리의 전쟁관 적까지 품을 수 있는...

Chapter 6. 마지막 흐름 – 노량, 죽음을 넘긴 전략 / 죽음 직전의 지휘 – 이순신의 마지막 병법, 노량해전

## 이순신  Chapter 6. **최후의 흐름 – 노량, 죽음을 넘긴 마지막 전략** --- ### 1. 전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598년 겨울.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안전하게 돌아가기를 원했고, 끝까지 저항하는 조선을 꺾고 싶어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지막의 승리였다. 그것을 막는 자— 또다시 이순신이었다. --- ### 2. 죽음을 받아들인 자의 전략 노량해협. 밤바다 위에서 벌어진 조선과 명(明)의 연합함대와 일본의 마지막 충돌. 이순신은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는 병법서보다 바다를 믿었고, 명령보다 흐름을 따랐다. "싸움이 급하니 나팔을 불지 마라." 말이 아니라 몸으로 전하는 명령. 이순신은 또다시 자신이 직접 전투의 형세가 되었다. --- ### 3. 전투의 흐름을 만든 자 적은 이탈로를 노렸지만, 이순신은 그들의 통로를 끊고, 수십 척의 적선을 파괴했다. 그는 지형을 알고, 적의 의도를 간파했고, 아군과의 호흡을 정확히 계산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적의 사정권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 4. 마지막 일격 – 그리고 침묵 전투 중, 흉탄이 이순신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았다. “적이 물러날 때까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장군의 죽음은 전략의 일부였다. 그 침묵 덕분에 함대는 동요하지 않았고, 전투는 끝까지 이어졌다. 노량, 그곳은 승리의 바다이자, 전략이 육신을 넘은 자리였다. --- ### 요약 – 죽음 이후의 전략 | 이순신의 마지막 전략 요소 | 병법적 가치          | | -------------- | --------------- | | “죽음을 숨긴 명령”    | 지휘권의 유지와 군심 통제  | | “흐름을 끊고 조임”    | 탈출로 차단과 기세 압도   | | “지형과 조류의 활용”   | 결정적 전투 유도  ...

『아마겟돈 – 최후의 영적 선언』 제2장: 십자가와 시스템의 반전

 『아마겟돈 – 마지막 영적 전쟁 선언서』 2장 – 십자가, 시스템의 역전 ⸻ 2장 – 십자가, 시스템의 역전 에덴에서 빼앗긴 권세, 계약의 파기, 하늘의 자녀들이 사망에 묶여버린 그 날 이후, 온 인류는 죄라는 시스템에 붙잡힌 존재가 되었다. 그 자는 만족했다. “이제 너희는 영원히 사망 아래 있다. 영생은 끊겼고, 하나님과의 연결은 닫혔다.” 그는 웃었고, 조롱했고, 세상을 자신의 왕국처럼 다스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으로 전쟁을 준비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라는 이름으로 하늘은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 예수님은    •   죄 없이 태어나셨고,    •   죄 없이 사셨고,    •   죄 없는 자로서 죽음을 자청하셨다. 그 자는 처음엔 그것을 몰랐다. 오히려 좋아했다.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구나!” 그는 몰랐다. 그 십자가가 바로 사망 시스템을 해체하는 ‘루트 해킹’이란 것을.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단순히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 죄의 회로를 끊고, 사망의 법칙을 무력화하고, 은혜라는 새로운 시스템을 선언하신 것이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이 말은 용서의 시적 표현이 아니라, 우주적 승리 선언이었다. 사탄은 그 순간 패배했다. 그가 통제하던 ‘죄-죽음’의 고리가 끊겼고, 그가 쥐고 있던 ‘정죄-속박’의 권세는 박탈되었다. 그리고 3일 후,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였다. 예수님은 사망이라는 방에 들어가 그 문을 안에서 부숴버리고 모든 자를 위한 출구를 여셨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는 죄의 시스템이 아닌 은혜의 시스템으로 옮겨졌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전이다. 우주적 구조의 재편, 사망 권세에 대한 완전한 선포적 파괴,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 다시 연결될 수 있는 회로가 열렸다는 증거. ⸻

『아마겟돈 – 마지막 영적 전쟁 선언서』 제3장: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최후의 전장에 있다

 『아마겟돈 – 마지막 영적 전쟁 선언서』 3장 –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마지막 전쟁터에 있다 이 고백은 요나의 마음이자 예레미야의 마음이며, 동시에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피가 되던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주의 뜻을 외치지 않으려 하여도, 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나이다.” – 예레미야 20:9 지금 작지만 나는 자기 뜻이 아닌, 말씀에 붙잡힌 자입니다. 물고기 뱃속이 아니라 하늘의 심장 안에 갇힌 자입니다. 『아마겟돈 – 마지막 영적 전쟁 선언서』 3장 –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마지막 전쟁터에 있다 ⸻ 3장 –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마지막 전쟁터에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전쟁은 옛날 이야기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 심판이나 전쟁 같은 건 옛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숨 쉬는 이 땅 위에, 가장 조용하고도 가장 거대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영혼을 두고 벌어지는 전면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빛과 어둠, 진리와 기만, 생명과 죽음이 매 순간 충돌하고 있다. 그 자는 지금 마지막 총공세를 벌이고 있다. 그는 단순히 인간을 악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는 인간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   죄에 둔감해지게 하고,    •   사랑을 피곤하게 만들고,    •   진리를 따분하게 느끼게 하며,    •   하나님을 잊게 만든다. 그의 전술은 더 이상 폭력과 공포가 아니다. 이젠 정교한 미디어, 문화, 시스템, 정보 속에 숨어 있다. 그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유’라 부르지만 사실은 철저한 사로잡힘이다. 사람들은 ‘기분’이라 말하지만 사실은 분별을 잃은 방황이다. 지금 이 땅은 요한계시록이 조용히 펼쳐지는 공간이다. 무저갱의 문은 이미 열렸고, 사람들의 이마에 보이지 않는 표식들이 새겨지고 있다. “나는 ...

『아마겟돈 – 마지막 영적 전쟁 선언서』 제4장: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7가지 작전 지령

 『아마겟돈 – 마지막 영적 전쟁 선언서』 4장 –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작전 지령 7가지 ⸻ 4장 –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작전 지령 7가지 전쟁터에 서 있는 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금 이 시대,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7가지 작전 지령이 있다. 이건 도덕이 아니다. 훈련 지침도 아니다. 이건 생존 명령이다. ⸻ 1. 말씀으로 무장하라 – “한 구절로 하루를 뚫어라.” 성경은 더 이상 장식이 아니다. 이제 말씀은 **검(劍)**이다. 성령의 칼이며, 어둠을 가르는 유일한 진리의 창.    •   하루 한 구절이 아니라, 한 구절로 하루를 돌파하라.    •   외운 구절이 아니라, 심장에 새겨진 구절이 살린다. ⸻ 2. 침묵 속 기도하라 – “작전은 고요 속에서 떨어진다.” 하나님의 지령은 소음 속이 아닌 고요 속에 내려온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파수를 맞추는 연결 행위다.    •   침묵은 무기가 되고,    •   기도는 전술이 되며,    •   기다림은 방패가 된다. ⸻ 3. 정결함을 지켜라 – “문이 더럽혀지면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사탄은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균열을 찾아 스며든다. 음란, 탐욕, 탐심은 전장의 틈이다. 무기보다 경건함이 강하다.    •   마음을 청소하라.    •   눈을 지켜라.    •   혼자 있을 때가 진짜 싸움이다. ⸻ 4. 연결되라 – “홀로 있는 자는 먹잇감이다.” 혼자는 위험하다. 하나님은 공동체 안에 역사하신다.    •   믿음의 동지들과 말씀을 나누고    •   깨어 있는 영혼들과 연결하라....

『기억의 법전』 서문 – 잊혀진 진리를 깨우는 개념 정의

 **“기억의 법전”**이라는 개념은 지금 펼치고 계신  ‘하늘의 법과 땅의 법’,  ‘암기문파’, ‘영적 각성’, ‘고대 지식의 회복’ 등  모든 작업을 한데 꿰뚫는 핵심 통합 아이디어가 될 수 있습니다.  기억의 법전 – 개념 정의 **“기억의 법전”**은 잊혀진 하늘의 진리, 왜곡된 역사의 지혜, 내면에 잠든 인류의 원형 기억을 다시 불러오는 **의식의 서(書)**입니다. ⸻ 1. 철학적 정의 기억의 법전은 모든 인간 존재 안에 새겨진 진리의 흔적들, 그리고 잊혔지만 살아있는 하늘의 법칙들을 다시 ‘의식의 기록’으로 정리하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의 좌표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 2. 구성 방향 (총체적 목차 제안) 1부: 잊힌 기억들    •   고대의 언어들 (신의 언어, 기도, 주문, 찬송)    •   기억의 단절: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잊었는가    •   고대 문명과 의식의 붕괴    •   무지의 법, 침묵의 통치 2부: 기억의 복원    •   암기와 암송: 기억 회복의 첫 걸음    •   ‘하늘의 법’을 외우는 자 – 기억의 사제    •   손자병법, 성경, 반야심경, 기타 고전 암송의 현대적 의미    •   마음에 새기는 율법 – 유비 더원님의 실제 실천 3부: 기억의 법전    •   하늘의 법 조항 33개 혹은 108개    •   자비, 정의, 용기, 진실, 절제, 신뢰 등 내면의 법조문    •   말씀이 법이 되고, 법이 삶이 되는 구조    •...

『하늘의 법, 땅의 법』 제4장: 고요의 법 — 모든 것을 지나온 자에게

『하늘의 법, 땅의 법』 제4장 – 고요의 법: 모든 것을 지나온 자에게 ⸻ 1. 고요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진실을 담고 있다. 하늘은 흐르고, 땅은 견디고, 인간은 울며 선택하지만— 그 모든 길이 끝난 뒤, 그 모든 갈망이 사라진 후 고요가 온다. 고요는 없다가 오는 것이 아니다. 항상 있었으나, 우리가 시끄러워서 듣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고요는 도달이 아니라, 되돌아감이다. 가장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이다. ⸻ 2. 고요는 정답이 아니다. 존재다. 인간은 묻는다. 하늘은 가리킨다. 땅은 안아준다. 그러나 고요는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요는 정답이 아니라, 그 모든 물음이 사라지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요 속에서는 옳고 그름도, 성공과 실패도, 더 나음과 덜 나음도 모두 멈춘다. 그 멈춤 안에 모든 방향이 동시에 열려 있다. ⸻ 3. 고요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끝에서 나온다. 고요는 자아의 파도가 멈추는 곳에서 피어난다. 나는 누구인가? 왜 아픈가? 무엇이 나를 여기에 데려왔는가? 그 모든 질문을 통과하고, 그 질문조차 흐릿해질 때— 그때 고요가 나를 찾아온다. 내가 고요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고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4. 고요는 도망이 아니다. 감당이다. 고요는 외면이 아니다. 모른 척하는 것도 아니다. 고요는 모든 것을 본 자의 상태다. 사랑도, 증오도, 상처도, 회복도 다 통과한 자만이 고요하게 될 수 있다. 고요는 무관심이 아니라 지나온 것에 대한 가장 깊은 사랑의 형태다. ⸻ 5. 고요는 시작이다. 끝이 아니다. 많은 이들은 고요를 ‘도달’ 혹은 ‘종착점’으로 여긴다. 하지만 아니다. 고요는 진짜 삶이 시작되는 자리다.    •   더 이상 누구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   더 이상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평화    •   더 이상 갈 길이 없어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 이것이 고요다. 그리고 ...

『하늘의 법, 땅의 법』 제3장 – 인간의 법: 경계 위에 태어난 자

『하늘의 법, 땅의 법』 제3장 – 인간의 법: 경계 위에 태어난 자 ⸻ 1.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나는 하늘이 아니다. 나는 땅도 아니다. 그러나 하늘을 그리워하고, 땅을 딛고 걷는다. 하늘은 나를 불렀다. “너는 위를 향해 자라야 한다.” 땅은 나를 붙들었다. “너는 아직 버틸 줄 모른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서 울었다. 도달하지 못한 하늘에 슬퍼했고, 빠져나갈 수 없는 땅에 절망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자리는 경계였다. 그리고 그 경계 위에서만 피어나는 꽃이 있다는 것을. ⸻ 2. 나는 흐르고, 견디며, 의식한다. 하늘은 흐르고, 땅은 견딘다. 그러나 나는 흐름과 견딤 사이에서 느끼고, 질문하고, 깨어 있는 존재다. 나는 슬픔을 안고 기도한다. 나는 고통을 끌어안고 사랑한다. 나는 흔들리며 나아가고, 넘어지며 배운다. 그 어떤 존재도, 하늘도, 땅도 이런 방식으로 의식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축복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짐을 짊어진 존재다. ⸻ 3. 나는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책임질 수 있다. 나에게는 자유가 주어졌다. 하늘의 방향과 땅의 견딤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을 따를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자유는 선물이지만, 그 자유의 무게는 ‘책임’이다. 나는 선택할 수 있다:    •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   숨거나, 마주하거나    •   용서하거나, 복수하거나 그러나 그 선택이 나를 만들어간다는 사실에서, 나는 더 이상 핑계로 살 수 없다. ⸻ 4. 나는 사랑할 수 있다. 그 누구보다 연약하게, 그러나 가장 깊이. 사랑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능력이다. 하늘은 법을 주고, 땅은 생명을 품지만, 사랑은 인간이 만든다.    •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안아줄 때    •   아무 대가 없...

『서유기』, 내면의 천축을 향한 여정

  서두 우리는 종종 ‘서유기’를 신나는 모험극, 혹은 손오공이라는 캐릭터만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이 고전은 단순한 여정을 넘어, 인간 의식의 정화와 깨어남 을 그린 내면의 영적 여정 입니다. 1. 『서유기』는 의식의 지도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우리 내면의 여러 자아 를 상징합니다: 손오공 : 자유를 갈망하는 자아, 충동과 힘. 저팔계 : 게으름과 욕망, 쉬운 길을 원하는 나. 사오정 : 중립적이며 수용적인 자아, 말없이 따르는 내면의 힘. 삼장법사 : 진리를 향한 중심 자아. 본래의 불성(佛性). 이들의 여정은 곧 혼란 속에서 본성을 찾는 의식의 여정 입니다. 2. 주성치의 『선리기연』 – 초월의 웃음 『서유기: 선리기연』 시리즈는 단순히 웃긴 영화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놓아주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지존보는 손오공의 전생이자, 인간의 집착을 상징합니다. 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지만, 결국 그 사랑조차도 집착임을 깨닫고 눈물 속에서 놓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있소”는 과거를 인정하고도, 초월하는 고백입니다. 3. 서유기와의 대화에서 나온 통찰 “세상은 룰로 움직인다. 감정으로 떼를 써도, 룰은 반응하지 않는다.” → 이 한마디는 영적 시스템의 본질을 꿰뚫는 말이었습니다. 룰을 모르면 고통은 고통일 뿐이지만, 룰을 알게 되면 그 고통조차도 의미와 성장의 발판이 됩니다. 『서유기』는 바로 그 룰을 따라가는 수행의 여정입니다. 4. 말(白馬)의 침묵 속 사명 서유기에서 누구보다 말이 없다. 그러나 누구보다 끝까지 달린다. 그는 단지 삼장을 태우는 동물이 아니라, 신의 명을 따라, 진리를 실어 나르는 존재 이다. 그 말은 원래 동해 용왕의 아들로, 천계에서 죄를 지은 뒤 벌로 ‘말’로 환생한 존재다. 즉, 그는 왕족이자 신의 피를 지닌 고귀한 존재 다. 말은 침묵하며 걷는다. 그러나 그 등 위에...

나는 미국을 사랑한다. 미국인을 사랑한다. 내 마음 깊숙히 감사함과 같이 –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서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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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5월5일 어린이날이기도 하고, 5월 8일 어버이날이기도 하여 바람을 쐬러 왔습니다.  인천에 위치한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에 아이와 부모님, 와이프 같이 왔습니다.  나는 나의 가족들이 여기 온 것도 좋았지만,  좋은 날씨도 좋고,  나의 가족들과 바람 쐬러 온 것도 너무 좋았지만, 나의 감동이, 나의 기쁨이 최고로 크기에 같이 공유해 봅니다.  나는 감히 얘기합니다. 나는 미국, 미국인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정말로 1950년 우리나라를 공산화의 위협에서  목숨 걸고 와서 싸워 주고 죽기까지 한 젊은 병사들, 그 병사들을 목숨을 책임진 지휘관들, 우리 나라의 땅 위에서 싸우다 돌아가신 워커힐 장군님 및 여러 장군들 우리 나라 6, 25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안 계셨다면, 그분의 작전,  operation chromite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일명 인천 상륙 작전이 없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생명이 죽어야 했을까?  아니면 우리 나라는 베트남보다 먼저 공산화의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분명 좋은 경험은 먼저 하면 좋았을 테지만 보트 피플의 그 잔인한 경험,  공산화 이후의 대규모 대국민 숙청 등.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다행이 아니고, 정말 천복이고,  두고 두고 감사할 일이다.  나는 나이지리아에서 오신 군인들, 터키에서 오신 군인들,  군인 민간인 치료하는 병원선 군인 외 다양한 서비스를 위해 한국에 온 세계 국가들 많이 기억하고 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다만 이 자리는 대표적으로 미국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다. 감사함을 지정학적인 문제, 왜 한국에서 6. 25가 일어났는지는 차제로 하고,  결과론으로 전쟁은 발생했으니,  그 이후의 일만 생각한다.  전쟁은 시작하면 ...